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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가 한창이던 2018년 봄 밤, 와인 초심자는 고이 아껴둔 레드와인 한병을 열었다. 진한 루비색 와인 가까이 코를 대자, 건포도·건자두 같은 마른 과실 내음이 눅진하게 피었다. 가죽 가방·옥수수 술빵을 떠올릴 법한 쿰쿰한 향들도 올라왔다. ‘봄에 어울리는 달콤한 맛 와인이겠구나’ 상상하며 잔에 입을 댔다. 그런데 웬걸, 술은 고무를 씹은 듯 떫고 맵기만 했다.
초심자는 인터넷에서 본 상식을 동원해 ‘심폐소생’에 나섰다. 와인잔 스템(줄기)을 쥐고 바닥에서 원을 그리며 돌리는가 하면, 안주도 달달한 과일에서 양념이 적은 닭고기로 바꿨다. 남은 와인은 냉장실에 잠시 넣어 온도를 낮춰봤다.
술을 달래 sk 통합 기를 2시간. 반병을 마시고서야 와인은 화사하게 피어났다. 아스팔트 포장내 같던 매콤함이 누그러졌고 구운 버섯을 연상케 하는 고소한 향이 자리를 채웠다. 과실미 역시 쿰쿰한 말린 과실에서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처럼 산뜻한 향으로 변했다. 입 안도 마찬가지. ‘고무맛’은 간데없고, 블루베리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듯 달콤한 과즙 맛이 혀를 즐겁게 했다. 매캐함은 당일대출가능한곳 와인을 넘긴 뒤 여운으로만 길게 남았다.
“전혀 다른 술이 됐다. 와인의 요정이라도 왔다가 간 걸까?” 알딸딸한 취기로 마지막 모금을 비우며, 4시간에 걸친 시음 노트를 마무리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뭔가를 ‘기록하며’ 와인을 마신 날이었다.



프랑스 다양한 빌라감정 산지의 와인들. 천호성 기자


‘와인 요정’의 정체를 안 건 그해 여름, 첫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 보르도로 건너가 와인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앞 시음에선 ‘스월링’(swirling·잔을 돌리는 동작)이 와인을 바꾼 것이었다. 스월링은 와인을 공기와 더욱 많이 접촉시켜 ‘산화’를 촉진하는 동작이다. 지급 와인이 공기와 닿으면 알코올·폴리페놀 등의 성분이 산소와 만나 산화되기 시작된다. 과실 외에 낙엽·흙 같은 진중한 복합미가 더해지고, 거친 탄닌(tannin·건조하고 떫은 느낌을 주는 천연 화합물)이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매니큐어 냄새 같은 휘발성 산이나, 황 성분에서 오는 불쾌한 향들이 스월링 도중 와인 표면에서 날아가는 건 덤이다. 아스팔트 포장, 술 차량연비향상 빵 등의 냄새는 잔을 흔들어 벗겨냈어야 할 ‘잡향’이었다.
와인 온도를 낮춘 점도 들큰한 과실 향을 신선하게 바꿔줬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본연의 산미가 무뎌지고 당미가 부각된다. 한여름 상온에 보관한 레드와인을 그대로 열어 마실 때처럼 알코올이 튀기도 한다. ‘모난 와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부르고뉴 샤블리(Chablis) 지역 샤르도네는 대개 섭씨 10∼12도의 낮은 온도에 마시라고 권한다. 이 와인 특유의 찌르는 듯한 산도와 미네랄 향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다. 여기에 와인과 함께하는 음식과 와인잔의 종류, 시음자의 기분, 취기 등 와인을 변주시키는 요소는 수없이 다양하다.



한 대형마트 와인 매대(2021년). 천호성 기자


이날의 경험 이후 와인을 마실 때마다 향과 맛을 스마트폰 노트 앱에 기록한다. 천의 얼굴로 바뀌는 와인의 모습을 남겨두기 위해서다. 지난번 맛있었던 와인이 다음에도 같은 맛을 뽐낼 거란 보장은 없다. 기쁜 날 ‘최애’ 와인을 열더라도, 와인은 내 기억 속 최고의 모습을 숨긴 채 바닥을 드러내곤 한다. 와인이 이전보다 과숙되었거나, 시음의 어느 조건이 틀어졌을 것이다. 이럴 땐 와인의 변덕이 야속하다. 하지만 시음기만은 오래 남아 그 와인이 가장 빛나던 순간을 떠올리게 해준다.
시음기를 ‘1000개’ 쓰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도 이때였다. 와인에는 코르크를 열기 전부터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변인도 있다. 품종, 산지, 생산 연도, 양조 방식 등이 그렇다. 이 모든 변수를 생각하면 와인이 보일 수 있는 맛과 향의 조합은 무한대에 가까워진다. ‘그중 일면이라도 이해하도록 대표적인 산지 10곳에서 100병 씩은 마셔보자’는 게 그때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1000병 째 와인을 ‘깐’ 건 2023년 연말께였다. 이만큼을 마셔도 광대무변한 와인의 세계를 걸음마로 헤매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다음에 만날 와인을 떠올리면 설렌다. 이 세계가 반복 없이 다채롭기 때문일 것이다.
※글머리에 시음한 와인은 칠레 콜차구아 밸리(Colchagua Valley) 지역의 ‘몬테스 알파 카베르네 소비뇽’(Montes Alpha Cabernet Sauvignon) 2014년이다. 대형 마트 와인 코너에 수십병씩 진열되는 그 와인 맞다.

천호성의 천병까기는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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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3315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