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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3일은 평범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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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onion
    댓글 0건 조회 27회 작성일 25-04-0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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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12월 3일은 평범한 겨울이었다. 2024년 12월 3일은 평범한 겨울이었다. 저녁 약속이 취소돼 여유롭기까지 했다. 난데없이 속보가 울렸다. 비상계엄이었다. 뉴스 생중계를 보면서 생각했다. 혹시 딥페이크 아닌가?고백하건대 그날 밤 기자는 비상계엄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했다. 계엄법을 검색해 기사를 쓰고, 법조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계엄의 의미를 들으면서도 ‘무섭다’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포고령 내용과 다르게 우리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상 근무 체제에 돌입한 모든 언론사에서 온라인 기사가 쏟아졌다. 계엄군이 국회 문을 깨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심각하다’ 생각했을 뿐이다.12·3 비상계엄이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공소장을 봤을 때 부터였다. 그날 밤 서울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는지를 일목요연한 텍스트로 확인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윤 전 대통령의 공소장에는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도 담겼다. ‘언론사 통제’는 빈 말이 아니었다.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그날 밤 썼던 기사는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비상계엄은 하나의 ‘체계’였다. 비상계엄 선포와 새로운 독재정권의 탄생은 같은 말이었다. 정권은 불리할 때마다 ‘비상사태’를 강요하며 국민의 민주화 욕망을 억눌렀다. 포고령은 국민과 언론의 입을 막는 도구였다. 포고령의 유통기한은 독재정권의 목숨보다 길었다. 포고령 위반으로 잡혀간 이들은 ‘전과자’라는 낙인을 짊어지고 살았다. 전과는 민주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 포고 제1호를 발령했다. 모든 정치활동 목적의 집회·시위를 일절 금하고,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은 검열하고, 대학에 휴교 조치를 내리고, 유언비어 날조를 금하는 총 8개의 조항이었다. 유신체제의 시작이었다. 2018년 12월 13일 대법원은 ‘박정희 포고령’이 위헌·위법하다고 결론 내렸다. 46년이 걸렸다.1980년 5월기후위기와 생태학살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하루하루 현실로 다가오는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과연 다른 세계는 가능할 것인가를 묻는다. 다른 세계는 물론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다른 행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아직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나무와 새들, 함께 호흡하는 뭇생명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함께 상상하고자 한다. <기자말>[정소은 기자]늘 '똥 냄새'가 문제였다. 하지만 예상 못 한 반전처럼, 속 썩이던 자식이 의외의 순간에 효도하듯, 30년 넘게 골칫거리였던 '똥 냄새' 덕분에 마을을 지켰다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작년 가을, 산업폐기물 관련 취재를 위해 공익법률센터 농본 하승수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에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들어설 뻔한 상황에서 농촌 주민이 통쾌하게 승리한 사례였다. (관련 기사: 땅 파서 큰돈 버는 사람들... 시골마을엔 '재앙' https://omn.kr/2bhhc)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환경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거의 망한 것만 같아, 몇 안 되는 승리담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충북 괴산군 사리면 대기마을 김용자 이장을 찾아갔다. 사리면은 8개 행정리로 나뉘며, 총 27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김용자 이장은 그중에서 '대기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큰터마을'이라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대기마을의 '대기(大基)'는 마을 터(基)가 넓다(大)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사리면 소매리 마을 전경. 사진 속에 보이는 산 전체와 마을 주민들의 땅 전부가 산업단지 부지로 들어가 버릴 뻔했다.ⓒ 정소은청년기를 보낸 도시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여기는 '똥 냄새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토지 소유자들 중에 외지인이 거의 없어요. 토지 소유자 대부분이 기존에 살던 분 아니면, 그 땅을 물려받은 자제분들이에요."괴산군 사리면에는 30년 전부터 돈사(돼지우리)가 세 곳 있었다. 바로 옆에 대규모 유기질 퇴비공장까지 있어서, 각종 분뇨를 들여와 뒤섞는 작업을 할 때마 2024년 12월 3일은 평범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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