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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119sh.info
김경수의 거의 사실을 기록한 ‘남문창의록’
- 못난 늙은이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의 관군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자, 전라도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난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끈 전라도 근왕군이 북상 도중 선조의 파천과 한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한 직후인 5월16일, 나주에서 김천일이 거병해 북상한 후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다.
5월29일에는 고경명이 담양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에서 일어나 6천 의병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7월10일 금산성 전투에서 순국한다.
고경명이 금산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도 사림들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공포와 민중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또 거병을 결심한다. 7월19일 장성에서 김경수·기효간 등이, 7월20일 보성에서 임계영·박광전이, 7월26일 화순에서 최경회가 중심이 되어 손오공릴게임 의병을 일으킨다. 이 다섯 의병 부대를 전라도 5대 의진이라 부른다.
전라도 5대 의진 중 김경수가 맹주가 된 의진이 장성 ‘남문의병’이다.
장성 남문의병은 전라도 의진 중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지만 맹주 김경수도, 장성 남문의병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장성 남문의병의 활동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서에 전혀 손오공게임 기록되지 않고 후대에 편찬된 ‘남문창의록’과 ‘오천집’(鰲川集) 등의 문집이나 ‘남문창의비’에만 기록돼 있는 사료상의 한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장성 남문의병의 맹주 김경수(金景壽, 1543-1621)는 1543년(중종 38)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자는 백형, 호는 오천(鰲川)이다. 유년 시절 큰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아버지 김응두에게 ‘효경’과 ‘소학’ 등을 배운 뒤, 족형(族兄)인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나이가 들고 학문이 깊어지면서 기효간·정운용·변이중과 함께 ‘오산 4강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천거에 의해 내섬시 봉사와 장악원 주부가 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정철의 천거로 예조 좌랑에 임명된다. 그런데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릴게임갓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자, 조정에 나가지 않고 세상과 인연을 끊으며 학문 연구에만 전념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고경명 부대가 7월10일 금산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경수는 7월18일 사촌 동생 김신남과 두 아들 극후·극순과 함께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9일, 기효간·윤진 등과 함께 남문루에 올라 격문을 작성하였는데, 이 격문이 뭇사람을 감동시킨 ‘남문창의격’(南門倡義檄)’이다.
“아아 노쇠하고 못난 이 사람이 삼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에게 고합니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북극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하매, 누구나 왕의 은혜를 입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우리 거룩한 조정의 어진 교화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리오. 국운이 중간에 쇠퇴하니 섬 오랑캐가 밖으로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려, 왜가 우리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아아, 우리 호남 50 고을에 의기 있는 남아가 어찌 없겠습니까. 돛대를 치며 강 위에서 맹세한 사나이의 지극한 정성을 기다리는 간절함과 창을 들고 죽음을 다투는 의기로 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면 얼마나 큰 본받음이겠습니까. 이 못난 사람이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뜻은 적개심이 간절하여 말에 오르는 용기를 보이니, 산줄기를 오르내리는 장수의 마음으로 더욱 경고해지고 물결을 휘감는 태공의 기운이 장합니다. 이에 부로와 호걸들을 초청하오니 본 장성현 남문의 의청(義廳)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1965년 김경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문집 ‘오천집’(鰲川集)의 발문을 쓴 김요원은 김경수의 격문을 “옛사람이 이르기를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고 했다. 허나 감히 이 몸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오천집 격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가히 피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마땅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장성 남문의병 맹주에 추대되다 김경수가 맹주로 추대된 후 활동한 1차 거의를 1799년(정조 23) 김인순에 간행된 ‘남문창의록’ 속의 ‘남문일기’를 근거로 재구성 해보자.
격문을 보고 7월21일 장성의 김중기·김덕기 형제가 가장 먼저 도착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7월23일 고창의 김홍우·김광우 형제가, 담양의 김언욱·김언희 형제가 집안의 가솔들을 이끌고 장성 남문에 이른다. 7월25일에는 백암사의 처능(處能) 등 승려들이, 8월28일에는 정읍의 유희진, 태인의 이수일, 무안의 윤황, 나주의 김부·김경남·홍원 등이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남문 창의에 동참한다.
11월11일에 모인 남문 의병은 1천600여 명, 군량은 500여 섬이었다. 그리고 11월17일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사에는 기효간, 참모에는 김홍우, 종사에는 윤진, 도유사에는 서연이 임명된다. 대오를 편성한 장성 남문의병은 11월24일 서울로 진군한다. 고경명 의진이 금산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7월18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한 후 격문을 보낸 지 4개월 만이었다.
제1차 장성 남문의병은 태인, 전주, 여산, 천안, 평택, 안성, 용인까지 북상했다가 1593년(선조 26) 2월17일 장성으로 되돌아온다. 활동 기간은 약 3개월이었다.
일본군과 큰 전투는 없었지만 2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12월19일 직산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군과 싸워 적병 수십 명을, 22일에는 진위에서 적 척후병 13명을 참살했다.
1차 거병 후 3달 만에 해산했던 것은 혹한과 폭설, 군량 부족으로 인해 의병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두 아들이 진주성에서 순국하다 조선에 출병한 명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일본군을 얕잡아보다가 1593년(선조 26) 2월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자, 서둘러 강화협상을 벌인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일본군은 1592년(선조 25)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해전에서의 연전연패로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자, 군수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소식을 접한 맹주 김경수는 1593년(선조 26) 5월29일 다시 각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과 군량을 모은다.
이에 호응해서 6월2일 고창의 김홍우가 동생 김광우를 시켜 의병 170명과 군량 72석을 보내왔으며 담양의 김언회는 의병 100명과 군량 50석을, 무안의 윤황은 의병 100여 명과 군량 70석을, 김신남은 의병 200명과 군량 39석을, 김인혼은 의병 65명과 군량 47석을 가지고 장성에 모인다.
6월3일 의병 836명과 군량 692석이 모아지자 김경수는 “자신이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갈 수 없다”면서, 큰아들 극후 등에게 의병을 이끌고 경상도로 가 고종후 군과 합세하도록 명령한다.
6월7일 장성 남문을 출발한 제2차 장성 남문의병이 진주성에 도착한 것은 6월15일이었다. 장성 남문의병은 이미 도착해 있던 고종후 군과 합세한다.
6월21일부터 시작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29일 동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된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의병장 김천일·최경회·고종후와 김극후·김극순 형제를 비롯한 장성 남문 의병 대부분이 순절한다.
진주성은 함락됐지만 힘에 부친 일본군은 전라도로의 진출을 포기한다. 장성 남문의병이 전라도를 지키는데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두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경수는 “내 비록 너희들이 살아오기를 바랐으나, 할 일을 다 하고 떳떳이 죽었으니 젊음이 아깝지 않도다. 외롭지 않게 순절하였으니 반드시 뜻을 같이할 사람이 있으리라”라고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 정유재란,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597년(선조 30) 1월,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했다. 임진왜란 초기와는 달리 주요 공격 목표는 전라도였다. 동년 7월16일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끈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후 경상도와 전라도로 진격한다. 그리고 8월16일 전라도의 거점인 남원성이 함락된다.
비보를 접한 김경수는 사촌 동생인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란 때 두 아들이 전사한 뒤부터 다시 날마다 원수를 갚을 일만 생각해왔다”면서, 의병을 다시 모아 줄 것을 요청한다. 김신남이 다시 모은 의병은 600여 명이었다. 장성에서 거의한 제3차 남문의병은 8월20일 여산을 거쳐 안성까지 진군한 후 9월10일 장성으로 돌아온 후 해산한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성과도 적지 않았다. 8월25일 경기도 소사에서 일군과 싸워 이겼으며 8월27일에는 일본군 32급을 참살하고 왜도(倭刀) 3자루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의병 100여 명이 순절하는 피해도 입는다.
- 장성 ‘오산창의비’의 제목이 둘이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사들의 충절을 기린 기념비가 서 있다. ‘장성 오산창의비’가 그것이다.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는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목이 둘이라는 점이다.
오산남문창의비각(장성군 북이면)
오산창의사 묘정비
하나는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적힌 ‘호남오산남문창의비’이고, 다른 하나는 뒷면과 양 측면 위쪽에 가로로 새긴 ‘유명조선호남오산남문창의비’이다. 앞면에는 비 제목의 양옆에 의병진의 주요 인물 77명의 이름이 신분별로 나눠 기록돼 있는데, 승려 9명과 노복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호남오산남문창의비(장성군 북이면)
오산창의사(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오산창의비 가까이에는 ‘오산창의사’가 있다. 1794년(정조 1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장성현 남문에서 의병청을 설치한 후 김경수를 맹주로 삼고 의병과 군량을 모집해 3차례나 의병 활동을 펼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오산창의사는 맹주 오천 김경수만 모신 곳은 아니다. 당시 의병 활동에 나섰던 선비, 관군, 승려, 노비까지 총 72명을 배향하고 있다. 신분 제도가 엄존했던 당시에 선비뿐만 아닌 승려·노비까지 배향했다니, 놀랍다.
함께 싸운 그들은 순절해 신분을 뛰어넘는 동지가 된 셈이었다.
- 못난 늙은이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조선의 관군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자, 전라도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난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끈 전라도 근왕군이 북상 도중 선조의 파천과 한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한 직후인 5월16일, 나주에서 김천일이 거병해 북상한 후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다.
5월29일에는 고경명이 담양 야마토게임무료다운받기 에서 일어나 6천 의병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7월10일 금산성 전투에서 순국한다.
고경명이 금산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도 사림들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공포와 민중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또 거병을 결심한다. 7월19일 장성에서 김경수·기효간 등이, 7월20일 보성에서 임계영·박광전이, 7월26일 화순에서 최경회가 중심이 되어 손오공릴게임 의병을 일으킨다. 이 다섯 의병 부대를 전라도 5대 의진이라 부른다.
전라도 5대 의진 중 김경수가 맹주가 된 의진이 장성 ‘남문의병’이다.
장성 남문의병은 전라도 의진 중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지만 맹주 김경수도, 장성 남문의병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장성 남문의병의 활동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찬서에 전혀 손오공게임 기록되지 않고 후대에 편찬된 ‘남문창의록’과 ‘오천집’(鰲川集) 등의 문집이나 ‘남문창의비’에만 기록돼 있는 사료상의 한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장성 남문의병의 맹주 김경수(金景壽, 1543-1621)는 1543년(중종 38) 장성군 북일면 오산리 죽남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자는 백형, 호는 오천(鰲川)이다. 유년 시절 큰 바다이야기무료머니 아버지 김응두에게 ‘효경’과 ‘소학’ 등을 배운 뒤, 족형(族兄)인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나이가 들고 학문이 깊어지면서 기효간·정운용·변이중과 함께 ‘오산 4강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천거에 의해 내섬시 봉사와 장악원 주부가 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정철의 천거로 예조 좌랑에 임명된다. 그런데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릴게임갓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강계로 유배되자, 조정에 나가지 않고 세상과 인연을 끊으며 학문 연구에만 전념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고경명 부대가 7월10일 금산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경수는 7월18일 사촌 동생 김신남과 두 아들 극후·극순과 함께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9일, 기효간·윤진 등과 함께 남문루에 올라 격문을 작성하였는데, 이 격문이 뭇사람을 감동시킨 ‘남문창의격’(南門倡義檄)’이다.
“아아 노쇠하고 못난 이 사람이 삼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에게 고합니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북극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하매, 누구나 왕의 은혜를 입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우리 거룩한 조정의 어진 교화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리오. 국운이 중간에 쇠퇴하니 섬 오랑캐가 밖으로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려, 왜가 우리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아아, 우리 호남 50 고을에 의기 있는 남아가 어찌 없겠습니까. 돛대를 치며 강 위에서 맹세한 사나이의 지극한 정성을 기다리는 간절함과 창을 들고 죽음을 다투는 의기로 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면 얼마나 큰 본받음이겠습니까. 이 못난 사람이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뜻은 적개심이 간절하여 말에 오르는 용기를 보이니, 산줄기를 오르내리는 장수의 마음으로 더욱 경고해지고 물결을 휘감는 태공의 기운이 장합니다. 이에 부로와 호걸들을 초청하오니 본 장성현 남문의 의청(義廳)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1965년 김경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문집 ‘오천집’(鰲川集)의 발문을 쓴 김요원은 김경수의 격문을 “옛사람이 이르기를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 흘리지 않는 자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고 했다. 허나 감히 이 몸이 이르기를 ‘세상에서 오천집 격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가히 피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마땅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장성 남문의병 맹주에 추대되다 김경수가 맹주로 추대된 후 활동한 1차 거의를 1799년(정조 23) 김인순에 간행된 ‘남문창의록’ 속의 ‘남문일기’를 근거로 재구성 해보자.
격문을 보고 7월21일 장성의 김중기·김덕기 형제가 가장 먼저 도착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7월23일 고창의 김홍우·김광우 형제가, 담양의 김언욱·김언희 형제가 집안의 가솔들을 이끌고 장성 남문에 이른다. 7월25일에는 백암사의 처능(處能) 등 승려들이, 8월28일에는 정읍의 유희진, 태인의 이수일, 무안의 윤황, 나주의 김부·김경남·홍원 등이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남문 창의에 동참한다.
11월11일에 모인 남문 의병은 1천600여 명, 군량은 500여 섬이었다. 그리고 11월17일 김경수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사에는 기효간, 참모에는 김홍우, 종사에는 윤진, 도유사에는 서연이 임명된다. 대오를 편성한 장성 남문의병은 11월24일 서울로 진군한다. 고경명 의진이 금산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7월18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한 후 격문을 보낸 지 4개월 만이었다.
제1차 장성 남문의병은 태인, 전주, 여산, 천안, 평택, 안성, 용인까지 북상했다가 1593년(선조 26) 2월17일 장성으로 되돌아온다. 활동 기간은 약 3개월이었다.
일본군과 큰 전투는 없었지만 2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12월19일 직산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군과 싸워 적병 수십 명을, 22일에는 진위에서 적 척후병 13명을 참살했다.
1차 거병 후 3달 만에 해산했던 것은 혹한과 폭설, 군량 부족으로 인해 의병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두 아들이 진주성에서 순국하다 조선에 출병한 명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일본군을 얕잡아보다가 1593년(선조 26) 2월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자, 서둘러 강화협상을 벌인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일본군은 1592년(선조 25)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해전에서의 연전연패로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자, 군수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소식을 접한 맹주 김경수는 1593년(선조 26) 5월29일 다시 각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과 군량을 모은다.
이에 호응해서 6월2일 고창의 김홍우가 동생 김광우를 시켜 의병 170명과 군량 72석을 보내왔으며 담양의 김언회는 의병 100명과 군량 50석을, 무안의 윤황은 의병 100여 명과 군량 70석을, 김신남은 의병 200명과 군량 39석을, 김인혼은 의병 65명과 군량 47석을 가지고 장성에 모인다.
6월3일 의병 836명과 군량 692석이 모아지자 김경수는 “자신이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갈 수 없다”면서, 큰아들 극후 등에게 의병을 이끌고 경상도로 가 고종후 군과 합세하도록 명령한다.
6월7일 장성 남문을 출발한 제2차 장성 남문의병이 진주성에 도착한 것은 6월15일이었다. 장성 남문의병은 이미 도착해 있던 고종후 군과 합세한다.
6월21일부터 시작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29일 동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된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의병장 김천일·최경회·고종후와 김극후·김극순 형제를 비롯한 장성 남문 의병 대부분이 순절한다.
진주성은 함락됐지만 힘에 부친 일본군은 전라도로의 진출을 포기한다. 장성 남문의병이 전라도를 지키는데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두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경수는 “내 비록 너희들이 살아오기를 바랐으나, 할 일을 다 하고 떳떳이 죽었으니 젊음이 아깝지 않도다. 외롭지 않게 순절하였으니 반드시 뜻을 같이할 사람이 있으리라”라고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 정유재란,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1597년(선조 30) 1월,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했다. 임진왜란 초기와는 달리 주요 공격 목표는 전라도였다. 동년 7월16일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끈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후 경상도와 전라도로 진격한다. 그리고 8월16일 전라도의 거점인 남원성이 함락된다.
비보를 접한 김경수는 사촌 동생인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란 때 두 아들이 전사한 뒤부터 다시 날마다 원수를 갚을 일만 생각해왔다”면서, 의병을 다시 모아 줄 것을 요청한다. 김신남이 다시 모은 의병은 600여 명이었다. 장성에서 거의한 제3차 남문의병은 8월20일 여산을 거쳐 안성까지 진군한 후 9월10일 장성으로 돌아온 후 해산한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활동이었지만 성과도 적지 않았다. 8월25일 경기도 소사에서 일군과 싸워 이겼으며 8월27일에는 일본군 32급을 참살하고 왜도(倭刀) 3자루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의병 100여 명이 순절하는 피해도 입는다.
- 장성 ‘오산창의비’의 제목이 둘이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사들의 충절을 기린 기념비가 서 있다. ‘장성 오산창의비’가 그것이다.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는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목이 둘이라는 점이다.
오산남문창의비각(장성군 북이면)
오산창의사 묘정비
하나는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적힌 ‘호남오산남문창의비’이고, 다른 하나는 뒷면과 양 측면 위쪽에 가로로 새긴 ‘유명조선호남오산남문창의비’이다. 앞면에는 비 제목의 양옆에 의병진의 주요 인물 77명의 이름이 신분별로 나눠 기록돼 있는데, 승려 9명과 노복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호남오산남문창의비(장성군 북이면)
오산창의사(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오산창의비 가까이에는 ‘오산창의사’가 있다. 1794년(정조 1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장성현 남문에서 의병청을 설치한 후 김경수를 맹주로 삼고 의병과 군량을 모집해 3차례나 의병 활동을 펼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오산창의사는 맹주 오천 김경수만 모신 곳은 아니다. 당시 의병 활동에 나섰던 선비, 관군, 승려, 노비까지 총 72명을 배향하고 있다. 신분 제도가 엄존했던 당시에 선비뿐만 아닌 승려·노비까지 배향했다니, 놀랍다.
함께 싸운 그들은 순절해 신분을 뛰어넘는 동지가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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