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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실천한 건 50대 중반이다. 그때부터플랫폼에 글을 올린 지 34개월이 지났다. 34개월이란 시간을 바쳤지만 성과는 미지근하다.
이름 석 자 또렷한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첫 발을 디뎠으나 제자리만 맴도는 느낌이다. 신선하고 독창적인 글쓰기가 녹록지 않다는 걸 여전히 실감한다. 읽고 쓰기에 몰입할수록 허리와 노안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허리, 어깨, 무릎, 발 안 아픈 데가 없을 때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읽고 쓰기를 끊지 못한다.
글로 쓰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솔직한 감정 알아챔, 그로 인해 가족이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삶과 앎의 달라진 밀도는 글쓰기가 준 혜택이다. 말로 다하 전세금 복비 지 못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글로 풀다 막힌 내면이 뚫릴 때면 구부정한 내가 반듯하게 서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들다, 어렵다 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스로 갱신되는 듯한 충족감이 대가 없이 쓰는 사람으로 사는 걸 연장시킨다.
다른 이의 수려한 문장 앞에서 나도 언젠간 누군가의 마음에 공감이 번지는 문장을 구사할 날 티머니 현금화 오겠지, 그런 희망으로도 쓴다. 내 문장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를 바라는 소망, 그것이 지속적인 습작으로 이끈다.

공감의 문장을 바라는 소망으로 책 한 권을 골랐다. <쓰는 여자, 작희>(2024년 5월 출간)엔 어쩐지 글쓰기의 근간을 이루는 실마리가 들었을 것 같아 덥석 집었다. '고은규'의 장편소설이다. 예상했던 학자금대출단기연체 이론서는 아니지만 내려놓을 수 없었다. '작희'란 이름에 '쓰는 여자'로 살 수밖에 없는 숙명이 모질게 드리운 것 같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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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는 여자, 작희> 고은규. 교유서가


ⓒ 알라딘 도서




<쓰는 여자, 작희>에는 3세대의 여성 작가가 등장한다. 식민지 세대인 1세대 중숙과 그의 부부창업 딸 2세대 작희, 중숙과 작희의 작품이 남성 작가 권력에 도용당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3세대 작가 은섬이 그들이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로 이어져온 1,2,3세대 여성들의 문학 의식과 80여 년 전 표절 사건 바로잡기를 '소설 쓰기'란 주제로 풀어간다. 남성 권력에 짓밟힌 여성 문학의 실태가 중심 내용이지만 글쓰기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어머니는 정말 이야기 쓰기를 사랑한 사람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어머니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저와 어머니가 다른 면이 있다면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쓰는 것 자체에 만족하는 사람이라서요. 자신의 글이 설사 타인에게 읽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그럼, 작희 씨는요?"
"저는 좋은 이야기를 쓰고 그 이야기가 가능하면 많이 읽히고, 더불어 제 이름도 알리고 싶어요. 이게 제 욕망이에요." - 본문 148쪽


1세대 중숙과 2세대 작희의 글쓰기 견해는 서로 다르다. 중숙은 '쓰기 자체가 꿈'인 사람이다.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선 봉건적 가부장제, 남성 중심 계급 사회, 제국주의의 폭력적 지배라는 굴레와도 싸워야 했다. 중숙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대가 없는 글쓰기에 몰두한 건 굴레에 맞선 강력한 항거라고 봐야 한다. 작희가 살아갈 세상은 여성도 마땅히 설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염원으로 중숙만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작희는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근본적 욕망을 정직하게 드러냈다. 사회적 인정, 공감적 열망, 정체성 각인을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 당당하고 작희다워 성숙한 자기 고백으로 들렸다. 그러나 끝없이 당당했던 그녀도 시대를 둘러싼 굴레에 갇혀 이슬로 사라졌다.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도모했지만 권력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녀들의 굴레는 다른 형태지만 3세대 은섬에게도 전이된다. 효율성·생산성·기술 중심 사회에서 소설 한 권 출간하는데 4000시간이나 들인다는 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이 분명한데 왜 집착하는 건지 은섬은 수시로 답답하다.
파밭에 붓을 심는 아이로 태어난 작희저럼(태몽) 태생적 글쟁이가 아니라면 은섬 같은 고민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 하루 꼬박 앉아 써도 흡족하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고 적절한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아 막힐 때도 수두룩하다. 애써 쓴 글이 낙오되면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런 과정이 수시로 오는데도 글쓰기를 집어치우지 않는 건 독특한 '자기 욕망' 없인 불가능한 일이라고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명예교수) 교수는 말한다. 글을 써야만 나일 수 있다는 중숙과 작희, 은섬의 갈망이 쓰는 여자로 살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내 문장이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게 여기지 말아요."
(중략)
나도······궁금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문장이 있나요? 그리고 행복한가요?"
- 본문 295쪽


도용당한 작품을 되찾게 된 날. 귀신으로 나타난 작희가 은섬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우리는 "당신의 문장", 그 하나를 위해 오늘도 내일도 글쓰기에 몰입한다. "당신의 문장"은 은섬 같은 프로 작가에게도,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도, 예비 창작자에게도 글쓰기의 강렬한 의지를 갖게 하는 핵심이다.

<쓰는 여자, 작희>에서 쓰는 사람의 침체기가 복원되길 기대한다. "당신의 문장"을 찾아 행복한 글쓰기에 전념하는 삶이 되길 손모아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