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구찌현 고엽제 피해자 보호 시설 '띠엔즈옌 복지원'에서 4세대 고엽제 피해자로 추정되는 옌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호찌민=허경주 특파원


아이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팔꿈치 아래뿐. 낯선 이가세력정보센터
다가가자, 표정 변화 없이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을 잠시 들어 올리다 곧 힘없이 떨어뜨렸다.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구찌현의 고엽제 피해자 보호 시설 ‘띠엔즈옌 복지원’에서 만난 옌(13)의 세상은 작은 철제 침대가 전부였다. 작은 키와 가는 팔다리는 그가 열세 살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몸무게는 10㎏ 남짓. 유아용주식패턴
기저귀 라지(L) 사이즈조차 헐거웠다.
옌은 생후 며칠 만에 복지원 입구에 버려졌다. 당시부터 근육 대부분이 마비된 상태였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나이와 증세로 미뤄 4세대 고엽제 피해자로 추정될 뿐이다. 쩐티깜장(87) 복지원 원장은 “13년 동안 옌을 돌봤지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온라인증권추천
“나무토막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하루 견디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구찌현 사회 보호 시설 '띠엔즈옌 복지원'에서 이곳에 머무는 고엽제 피해자들이 철제 침상 안에 앉아있다. 호찌민=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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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가장 어린 옌부터 여든 가까운 노인까지, 약 60명이 머물고 있다. 전쟁 중 고엽제에 직접 노출됐거나 그 자녀, 손자녀로 태어난 2·3·4세대 피해자들이다. 신체 기형과 정신 질환 등 증세도 다양하다.
대부분은 사방이 막힌 철제 침대 안에서 하루 종일 지낸다. 인지 기능이 비교적 유지되고 거동이 가능한해동선투자클럽
경우 특수 교육이나 재활 시설을 오갈 수 있지만, 그런 이들은 극히 일부다.
또 다른 침상에서는 한 노인이 30대 아들의 입에 조심스럽게 죽을 떠 넣고 있었다. 중증 자폐를 앓는 아들은 애끊는 부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갓난아이처럼 이불과 옷가지 등 손에 잡히는 물건만 입에 넣고 있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경우 자해 위험이 있어 보호자나 봉사자가 곁을 떠나지 못한다. 복지원 교사 마이는 “고엽제 피해자들은 평생 전쟁이 남긴 그림자와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구찌현 사회 보호 시설 '띠엔즈옌 복지원'에서 한 남성이 심각한 고엽제 피해 후유증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밥을 떠 넣어주고 있다. 호찌민=허경주 특파원



전쟁은 끝나도 고엽제는 계속된다
베트남전쟁(1955~1975년)이 지난달 30일로 종전 50주년을 맞았다. 한때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과 베트남, 미국과 베트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과거의 앙금을 털고 화해와 협력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깊게 남아 있다. 고엽제 피해가 대표적이다.
미군은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중·남부에 8,000만 리터(L)에 달하는 고엽제(Agent Orange·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했다. 정글을 파괴해 시야를 확보하고, 밀림을 은신처 삼아 활동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비정규군(베트콩)의 게릴라전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맹독성 다이옥신 계열 화학물질인 고엽제는 인체에 흡수돼 수년 뒤 암, 당뇨 등 면역·내분비계 문제와 신경계·정신 질환 등을 유발했다. 살포한 이도, 오염 지역에서 생활한 주민도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 중부 지방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를 분사하는 미군기. thechive.com 캡처


베트남 정부는 최대 480만 명의 국민이 고엽제에 노출됐고, 약 300만 명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고 추산한다. 더 큰 문제는 ‘대물림’이다. 무뇌증, 사지 결손, 척추이분증 등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2·3세대 피해자는 최소 15만 명, 옌처럼 유전적 영향이 나타난 4세대 피해자도 약 2,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고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까지 상흔이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 보상은 제한적이다. 참전 이력이나 군인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까다로운 진단 기준을 통과해야만 치료 지원과 최대 월 500만 동(약 27만7,000원)의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독성 물질에 노출된 일반인은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조차 어렵다. 이들의 2·3세대를 피해로 인정하는 사례도 드물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이들이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11년 베트남 호찌민시 인근의 한 병원 고엽제 피해자 수용 시설에 한 어린이가 입원해 있다. 김성찬씨 제공


베트남 고엽제피해자협회(VAVA) 호찌민 지부 소속 쩐응옥토(76) 전 베트남 제7군구 참모장은 “현재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에 쌓여있는 고엽제 피해자 인정 신청서만 30만~40만 건에 달한다”며 “워낙 방대한 양이어서 정부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차별도 여전하다. 가족 중 고엽제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피해가 심한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준비하던 청년들이 파혼당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고엽제는 또 하나의 ‘사회적 낙인’이 되고 있다.

“과거 아닌 현재진행형인 비극”
누군가에겐 일상이 된 고통이 또 다른 이에겐 처음 마주한 충격이었다. 지난달 15일 호찌민시 ‘전쟁 증적(證跡)박물관’ 내 고엽제 피해 전시관에는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관람객들은 고엽제가 인간에 남긴 참혹한 흔적이 담긴 흑백 사진 앞에서 눈물만 훔쳤다.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 박물관 내 고엽제 피해자 전시관에서 관광객들이 다양한 모습의 피해자가 담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호찌민=허경주 특파원


미국에서 온 토머스(25)는 “과거 우리 정부가 저지른 일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이건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고엽제로 인해 산모의 뱃속에서 숨진 태아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유리병에 보존한 사진 앞에서는 일부 서양 관광객이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기도하기도 했다. 미국인 관광객 앨리(34)와 로빈 스트라우스(33)는 “전쟁이 세대를 넘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절감했다”며 “고엽제는 전 세계가 기억해야 할 비극”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첫 번째는 전장에서, 두 번째는 기억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탄 응우옌은 베트남전을 다룬 저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남긴 고엽제 참상의 기억을 외면하지 않는 일, 그것이 베트남전 종전 50주년을 맞은 베트남과 미국, 그리고 한국에 남은 책임의 시작일지 모른다.



지난달 15일 베트남 호찌민시 전쟁증적 박물관 내 고엽제 피해자 전시관에서 한 관광객이 고엽제 피해자 모습이 담긴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호찌민=허경주 특파원


호찌민=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