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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의 아쉬웠던 장면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같은 책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 강의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 언급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과거와 점차 다가올 미래 사이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바다이야기합법 했다”라고 했다. 역사는 미래를 위한 등대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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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탈냉전 변혁기에 민주 강소국·문화강국으로 성장했지만 내각제·개성공단 실패, 민주주의 위기와 북핵 위협으로 이어져 IMF는 IT 강국 계기 됐지만 정확한 원인규명, 책임진 사람 없어 극한 이념 갈등, 여성·소수자 혐오는 외 바다이야기비밀코드 교 지속성, 한류에 악영향 」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 올해는 광복 80년이 되는 해였고,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였을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였다. 올해 썼던 글들은 대부분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냉전의 위기 속에서 한국이 얼마나 잘해 왔던가가 주요한 주제였다. 미국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빌면 “기대보다 잘했 릴박스 던” 80년간의 한국이었다.
조공질서에서 제국으로, 다시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지난 120년간 세상은 정신 차리기 어렵게 변화를 거듭했고, 그 와중에 한국은 세계에서 주목받는 민주주의 강소국이자 문화강국이 되었다. 1905년이나 1945년의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 골드몽게임 는 것일까?
되돌아보면 지난 80년간 다가올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장면도 적지 않았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세계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스스로 상황을 바꾸기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다가올 미래를 위해 안타까운 장면도 적지 않았다.
실패한 의원내각제 1960년 의원내각제의 실패가 그 하나였다. 1 바다이야기프로그램 948년 정부 수립 이후 12년, 동족상쟁의 비극이 멈춘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한국은 전 세계 신생국 중 처음으로 시민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이룩되었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배경으로 한 자유당 독재에 반발한 국민은 의원내각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안보적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관리를 위해서 대통령제가 더 유효하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1980년의 서울의 봄, 1987년의 개헌 정국에서 의원내각제는 더 이상 옵션에 끼지도 못했다. 1986년 개헌이 논의될 때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대안으로 의원내각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직선제를 막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1960년 비민주적인 정부와 부정선거가 극에 달해 일으킨 4·19혁명 당시 시위대의 모습. [중앙포토]
1960년의 실패는 국민의 선택이 아니었다. 4·19 혁명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군사정변 때문이었다. 1년간의 짧은 실험이 불법 정변에 의해 실패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더 이상 고려할 필요 없는 옵션이 되었다. 지난 80년간 대통령제가 독재와 전횡, 국정농단과 탄핵, 정책 정당의 실패라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960년에 있었던 짧은 기간의 실험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경험이었다.
8·3조치와 외채 위기
1972년 8월 2일 밤 11시40분, 태완선 부총리가 8·3 사채 동결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던 경제위기의 처리 방식 역시 되돌아봐야 한다. 1960년대 말 부실기업 문제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1972년 8·3조치로 마무리되었다. 경제성장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사채를 동결했던 8·3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제 막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대통령은 사유재산권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8·3 긴급명령을 발표하면서 일부 기업가들의 부도덕성을 꼬집었다. 차관의 무분별한 도입과 사용, 부동산 투기, 그리고 위장사채를 통해 부실 위기를 불러온 기업가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경고했다. 이번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유사한 위기가 또 한 번 찾아왔다. 정부는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을 발표했다. 제2차 오일쇼크와 세계 경제의 유동성 위기, 한국 기업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와 중동 건설 특수 등이 불러온 위기였다. 1970년대 말 부동산투기 역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외채는 급증했고, 미국 정부가 경제위기의 해결을 위해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책임지는 사람 없었던 97년 금융위기 정부는 다시 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산을 대표했던 국제그룹과 함께 동명그룹·명성그룹·삼호그룹·대한선주·동양방송 등이 정리되었지만,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는 소문이 돌았다. 구조조정 과정에 재벌 구조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가 캉드쉬 IMF총재와 합의문에 서명한 후 악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1997년의 위기는 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하여 구제금융을 받았고, 그 대가로 국제통화기금에서 경제정책을 좌우할 수 있었다. 국민은 225t의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리고자 했다. 한국 정부가 빠르게 외채를 갚을 수 있었다는 점, 벤처투자를 통해 IT 강국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위기 극복 과정은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위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시 경제위기 직전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던 정부도, 관료도, 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해야 했던 국회도, 과도한 채무에도 무리한 기업확장으로 경제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기업인들, 그 누구도 국민 전체를 ‘멘붕’으로 몰아간 상황에 책임지지 않았다. 어떤 국민도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오죽하면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까지 나왔겠는가?
금강산과 개성의 추억
2020년 6월 1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영상. 옆에 15층 높이의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중앙포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도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1994년의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했다면, 북한이 지금과 같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는 북한의 신뢰할 수 없는 행위와 미국의 대외정책이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에 한국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와 함께 방북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북의 지도자와 손을 잡는 장면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 결과 금강산을 관광할 수 있었고, 개성공단이 열렸다.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들의 가장 사랑받는 관광지였던 금강산을 방문하는 것은 꿈이 이루어지는 차원을 넘어 한반도 동쪽 북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수㎞ 북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개성공단 또한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다. 남한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이 적지 않았고, 한미 FTA에서 개성공단 제품은 중요한 논점이 되기도 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지역을 발굴하는 역사학자들의 행복함도 잊을 수 없다. 서울에서 가까운 군사분계선 지역이 북쪽으로 북상함으로써 수도권의 안보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0년대 후반 1년에 200회 이상 발생했던 비무장지대에서의 분쟁이 금강산과 개성공단 부근에서는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속에서도 개성공단은 지속되었다. 2016년 유엔제재로 문을 닫기 전까지 북한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실험도 개성공단의 문을 닫지 못했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긴 정전체제의 위기를 끝낼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개성공단의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분쟁지역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판 매카시즘과 혐오의 위기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었다. 보수와 진보는 좌익이나 우익처럼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었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이념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1994년 조문 파동과 주사파 파동으로 발생했던 매카시즘은 보수와 진보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과거 냉전시대로 회귀하도록 했다.
이러한 회귀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탈북자와 재외동포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남북관계와 대외관계로 확장되었다. 한국의 전통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사과했고, 평화유지군도 파견했다. 그러나 최근 나타나고 있는 혐오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외교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97년 경제위기 이후 나타난 무제한적 경쟁으로 여성이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젠더 간 갈등이 새로운 세대에서 나타난다는 점이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새로운 비전의 부재, 무한경쟁, 남북 간의 긴장, 사드(THAAD)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한한령 등이 모두 혐오의 배경이 되었다. 혐오적 감성은 장기적으로 한류의 세계화까지도 위협할 것이다.
최근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80년간 있었던 사건들은 대부분 세계사적 상황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가피했다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사건들이 있고,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사건들도 있었다. 이 사건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를 과거와 다가올 미래와의 대화라고 한다면, 미래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안정을 위해서 지난 80년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광복 80년의 아쉬웠던 장면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같은 책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전 강의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로 언급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과거와 점차 다가올 미래 사이의 대화라고 불렀어야 바다이야기합법 했다”라고 했다. 역사는 미래를 위한 등대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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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탈냉전 변혁기에 민주 강소국·문화강국으로 성장했지만 내각제·개성공단 실패, 민주주의 위기와 북핵 위협으로 이어져 IMF는 IT 강국 계기 됐지만 정확한 원인규명, 책임진 사람 없어 극한 이념 갈등, 여성·소수자 혐오는 외 바다이야기비밀코드 교 지속성, 한류에 악영향 」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 올해는 광복 80년이 되는 해였고, 한일협정 60년이 되는 해였을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으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였다. 올해 썼던 글들은 대부분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냉전의 위기 속에서 한국이 얼마나 잘해 왔던가가 주요한 주제였다. 미국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빌면 “기대보다 잘했 릴박스 던” 80년간의 한국이었다.
조공질서에서 제국으로, 다시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지난 120년간 세상은 정신 차리기 어렵게 변화를 거듭했고, 그 와중에 한국은 세계에서 주목받는 민주주의 강소국이자 문화강국이 되었다. 1905년이나 1945년의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 골드몽게임 는 것일까?
되돌아보면 지난 80년간 다가올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장면도 적지 않았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세계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스스로 상황을 바꾸기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다가올 미래를 위해 안타까운 장면도 적지 않았다.
실패한 의원내각제 1960년 의원내각제의 실패가 그 하나였다. 1 바다이야기프로그램 948년 정부 수립 이후 12년, 동족상쟁의 비극이 멈춘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한국은 전 세계 신생국 중 처음으로 시민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이룩되었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배경으로 한 자유당 독재에 반발한 국민은 의원내각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안보적 위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정책 결정과 관리를 위해서 대통령제가 더 유효하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1980년의 서울의 봄, 1987년의 개헌 정국에서 의원내각제는 더 이상 옵션에 끼지도 못했다. 1986년 개헌이 논의될 때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대안으로 의원내각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직선제를 막기 위한 꼼수로 받아들여졌다.
1960년 비민주적인 정부와 부정선거가 극에 달해 일으킨 4·19혁명 당시 시위대의 모습. [중앙포토]
1960년의 실패는 국민의 선택이 아니었다. 4·19 혁명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군사정변 때문이었다. 1년간의 짧은 실험이 불법 정변에 의해 실패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더 이상 고려할 필요 없는 옵션이 되었다. 지난 80년간 대통령제가 독재와 전횡, 국정농단과 탄핵, 정책 정당의 실패라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960년에 있었던 짧은 기간의 실험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경험이었다.
8·3조치와 외채 위기
1972년 8월 2일 밤 11시40분, 태완선 부총리가 8·3 사채 동결 조치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던 경제위기의 처리 방식 역시 되돌아봐야 한다. 1960년대 말 부실기업 문제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1972년 8·3조치로 마무리되었다. 경제성장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상황에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사채를 동결했던 8·3조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제 막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대통령은 사유재산권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8·3 긴급명령을 발표하면서 일부 기업가들의 부도덕성을 꼬집었다. 차관의 무분별한 도입과 사용, 부동산 투기, 그리고 위장사채를 통해 부실 위기를 불러온 기업가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경고했다. 이번에는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1979년 유사한 위기가 또 한 번 찾아왔다. 정부는 경제 안정화 종합시책을 발표했다. 제2차 오일쇼크와 세계 경제의 유동성 위기, 한국 기업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와 중동 건설 특수 등이 불러온 위기였다. 1970년대 말 부동산투기 역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외채는 급증했고, 미국 정부가 경제위기의 해결을 위해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책임지는 사람 없었던 97년 금융위기 정부는 다시 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산을 대표했던 국제그룹과 함께 동명그룹·명성그룹·삼호그룹·대한선주·동양방송 등이 정리되었지만,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더 컸다는 소문이 돌았다. 구조조정 과정에 재벌 구조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부총리가 캉드쉬 IMF총재와 합의문에 서명한 후 악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1997년의 위기는 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하여 구제금융을 받았고, 그 대가로 국제통화기금에서 경제정책을 좌우할 수 있었다. 국민은 225t의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리고자 했다. 한국 정부가 빠르게 외채를 갚을 수 있었다는 점, 벤처투자를 통해 IT 강국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위기 극복 과정은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위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당시 경제위기 직전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던 정부도, 관료도, 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해야 했던 국회도, 과도한 채무에도 무리한 기업확장으로 경제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기업인들, 그 누구도 국민 전체를 ‘멘붕’으로 몰아간 상황에 책임지지 않았다. 어떤 국민도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오죽하면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까지 나왔겠는가?
금강산과 개성의 추억
2020년 6월 17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영상. 옆에 15층 높이의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중앙포토]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도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1994년의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했다면, 북한이 지금과 같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는 북한의 신뢰할 수 없는 행위와 미국의 대외정책이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에 한국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이 소 떼와 함께 방북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북의 지도자와 손을 잡는 장면은 한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 결과 금강산을 관광할 수 있었고, 개성공단이 열렸다.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들의 가장 사랑받는 관광지였던 금강산을 방문하는 것은 꿈이 이루어지는 차원을 넘어 한반도 동쪽 북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수㎞ 북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개성공단 또한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다. 남한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이 적지 않았고, 한미 FTA에서 개성공단 제품은 중요한 논점이 되기도 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지역을 발굴하는 역사학자들의 행복함도 잊을 수 없다. 서울에서 가까운 군사분계선 지역이 북쪽으로 북상함으로써 수도권의 안보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0년대 후반 1년에 200회 이상 발생했던 비무장지대에서의 분쟁이 금강산과 개성공단 부근에서는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속에서도 개성공단은 지속되었다. 2016년 유엔제재로 문을 닫기 전까지 북한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실험도 개성공단의 문을 닫지 못했다.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긴 정전체제의 위기를 끝낼 수 있는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개성공단의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분쟁지역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중요한 사례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국판 매카시즘과 혐오의 위기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었다. 보수와 진보는 좌익이나 우익처럼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었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이념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나 1994년 조문 파동과 주사파 파동으로 발생했던 매카시즘은 보수와 진보가 새로운 이념이 아니라 과거 냉전시대로 회귀하도록 했다.
이러한 회귀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탈북자와 재외동포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남북관계와 대외관계로 확장되었다. 한국의 전통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사과했고, 평화유지군도 파견했다. 그러나 최근 나타나고 있는 혐오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외교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97년 경제위기 이후 나타난 무제한적 경쟁으로 여성이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젠더 간 갈등이 새로운 세대에서 나타난다는 점이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새로운 비전의 부재, 무한경쟁, 남북 간의 긴장, 사드(THAAD)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한한령 등이 모두 혐오의 배경이 되었다. 혐오적 감성은 장기적으로 한류의 세계화까지도 위협할 것이다.
최근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80년간 있었던 사건들은 대부분 세계사적 상황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가피했다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사건들이 있고,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사건들도 있었다. 이 사건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를 과거와 다가올 미래와의 대화라고 한다면, 미래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안정을 위해서 지난 80년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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