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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250㎞ 달리면 최대 항구 도시 시아누크빌의 오트레 해변이 나온다. 새하얀 모래 해변과 잔잔한 포말(泡沫)로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숨은 보석’이라고 불려왔다. 지난 19일 해변에서 약 500m 떨어진 차이나타운을 찾았더니 35도 기준금리 를 넘는 날씨에도 으스스했다. 2차선 도로 양쪽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은 짓다 만 상태로 마감도 안 돼 있었다. 그늘이 진 골목에 있는 마트와 게스트하우스들은 폐업한 지 오래였다.
건물 단지 입구엔 검문소가 설치돼 경비원들이 모든 차량을 검문했다. 고층 건물 가까이 가보니 2~3층 발코니는 철창으로 빼곡히 막혀 있었다. 한 캄보디아 남성이 보너스 기자에게 다가와 “몸조심하라”고 속삭였다. 그러면서 고층 발코니를 멍한 표정으로 오가며 담배 피우고 빨래 널던 아시아 남성들을 가리켰다. “여긴 범죄 소굴이다. 요즘 한국에서 온 (범죄) 조직원이 많은데, 당신도 한국인인가?”
동남아 대표 관광지인 캄보디아가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주요 근거지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몇 년간은 수도 프놈펜 비소구 에 이어 시아누크빌로 범죄 조직들이 몰리고 있다. 미국평화연구소(USIP)에 따르면 작년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온라인 범죄 규모는 125억달러(약 17조2500억원)로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의 27%에 달했다. 동원된 노동력은 15만명이 넘었다. 이 조직들은 주로 중국인들이 이끌지만, 조직원들은 한국인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들이 우리 국민을 타깃 삼 통장 빌려주면 아 매년 수백억~수천억 원을 가로채고 있다. 그러나 해외에 있어 검거가 쉽지 않다.
본지는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시아누크빌을 찾아 보이스피싱 범죄 실태를 취재했다. 이곳 범죄 조직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은 2000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캄보디아 경찰이 추산한 수치로, 캄보디아 내에서 범죄에 가담하는 한국인들의 구 개인회생제도가온법률사무소 체적인 규모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픽=박상훈


◇中 조폭이 CEO, 한국인이 말단 사원… 성과급 주며 스타트업처럼 운영
캄보디아를 찾았다가 현지 조직에 납치·감금된 것으로 확인된 한국인 수도 2023년 21명에서 지난해 221명이 돼 10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올해도 상반기 6개월 만에 작년 전체 수치에 육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캄보디아 경찰 관계자는 “최근 몇 년간 캄보디아로 오는 중국·한국 범죄 조직원 수가 급증해 치안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고 했다.
19일 저녁 시아누크빌 시내 상점과 호텔 곳곳엔 중국어로 적힌 대형 간판이 번쩍였다. 도로 양옆 가로등에 걸린 캄보디아 국기만 아니었다면 중국 도시로 착각할 뻔했다. 짓다 만 건물, 폐업한 상점들 사이에서 그나마 문을 연 곳은 중국어 간판이 걸린 카지노 업소들이었다. 한 업소에 들어갔더니 경비원과 딜러들이 안을 바쁘게 오갔다. 캄보디아 현지인들은 현찰을 쌓아놓고 블랙잭·바카라를 하고 있었다.
이 카지노는 1·2층만 쓰고 있었다. 3층부터는 모든 창문이 검은색 창살로 막혀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카지노에 딸려 있게 마련인 호텔도 없었다. 현지 교민은 “카지노 업장 위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들이 먹고 자면서 ‘일’하고 있다”며 “경비가 삼엄해 일반인들은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관광·카지노 도시로 급성장하던 시아누크빌이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주요 범죄 무대로 전락한 건 최근 몇 년 사이 일이다. 2017년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책에 따라 자본이 몰려들어 호텔과 콘도, 상업 시설이 줄줄이 세워졌다. 해변가에도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게스트 하우스, 식당이 들어섰다. 중국 차관으로 프놈펜과 시아누크빌을 잇는 고속도로도 건설돼 2022년 완공됐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거리./이기우 기자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글로벌 경기 침체가 겹쳐 중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곳곳에 미완공 건물이 늘어났다. 중국 정부의 해외 도박 단속 강화가 겹치면서 카지노 건설도 중단됐다. 이렇게 짓다 만 건물들은 중국 범죄 조직들의 아지트가 되고 있다. 시아누크빌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교민은 “이곳에서 중국 범죄자들 지시를 받는 조직원 중 한국인 비율이 계속 늘고 있다”며 “한국인들이 해외까지 와서 중국 두목 지시를 받고 조국을 등쳐먹는 기가 막힌 상황”이라고 했다.
본지는 캄보디아 국경 도시 목바이의 범죄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한 조직원을 만났다. “대기업이라고 보시면 돼요. CEO(최고경영자) 등 경영진은 중국 조폭들인데, 말단은 한국·태국·베트남인들이죠. 몇 개 층을 통째로 빌려서 작업장으로 씁니다.” 이 조직들은 중국계 총책 주도로 범죄 수법에 따라 수사·금융 기관을 사칭해 피해자들을 압박하는 ‘검찰팀’, 피해자 휴대폰에 악성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유도하는 ‘해킹팀’, 조직 자금을 관리·세탁하는 ‘이체팀’ 등으로 업무를 나누고 있다. 중국인 윗선이 만든 사기 시나리오 한글 번역, 피해자들 관심을 끌기 위한 한국어 인터넷 방송 진행, 한국어 전화 응대 등 철저한 분업화, 한국화를 통해 우리 국민을 노리고 있다.
그간 중국 조직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고소득 알바 등의 홍보 문구를 내세워 한국인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납치·감금한 뒤 보이스피싱 일을 강요해왔다. 하지만 최근 2~3년간 언론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많이 알려지자, 요즘은 계약을 맺고 고용하는 이른바 범죄 스타트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 달 2000~3000달러(약 270만~415만원) 월급에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고 외출이나 휴대폰 통화도 자유롭게 해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제대로 월급을 줘도 ‘남는 장사’기 때문이다.
‘입사’와 동시에 조직이 여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마음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한 한국인 조직원은 “성과를 크게 내 에이스로 평가받는 조직원들에겐 윗선에서 ‘여기서 떼돈을 버는 게 한국에서 아등바등 일하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며 여권을 돌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현지 경찰 관계자는 “최근엔 돈벌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에 가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도시 전체가 범죄 조직화되면서 현지 상권도 이 조직들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 위주로 변형되고 있다. 현지에서 마사지 숍을 운영하는 교민은 “매일같이 한국계 범죄 조직에서 출장 마사지 의뢰가 온다”고 했다. 시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교민은 “하루 비빔밥, 설렁탕 등 세 끼 1000그릇 가까이 배달하기도 했다”고 했다.